80년대 초 처음 이탈리아 구경을 갔을때 로마의 성 베드로 성당 그늘 아래 앉아 있자니 뜰을 가로 질러 가는 어떤 젊은 여성의 뒷모습이 보였다. 붉은색의 타이트 스커트에 흰색 블라우스 차림의 여성이 초록색의 힐을 신고 또박또박 구두소리를 내며 작은 광장을 지나가고 있었는데 하얀 종아리에 부딪히는 햇살과 진홍의 요염한 빛깔을 받은 탓인지 뒷모습 전체가 너무도 황홀해보였다. 번쩍거리는 하얀 종아리와 붉은색 스커트, 초록색 구두의 어울림이 지금도 이탈리아를 생각하면 맨 먼저 떠오르는 단편이다. 아마 솔직한 본능이라고 한다면 쫓아가서 말이라도 건네 봤을 것이다. 그러한 이탈리아의 상징 같은 모습을 한참 지나서 다시 만났다. 패토스의 트윈타워는 붉은 색 전해 코덴서가 도열하고 있는 인티 앰프다.

그 앰프를 불문곡직하고 써봤음은 물론이다. 그 뒤로 또 약간 지나서 소누스 파베르의 스피커가 나왔다. 이 스피커를 처음 봤을 때 역시 불문곡직하고 어루만져봤다. 이건 스피커가 아니라는 놀라움이 떠올랐다. 성 베드로 광장을 가로질러 가던 그 붉은색 스커트의 여성이 홀연히 나타난 것 같았기 때문이다. 도대체 이탈리아의 어떤 기술력이 이런 아름다운 스피커를 만들어 낼 수 있단 말인가.

스피커에는 각기 그 나라만의 분위기가 있다고 일컬어진다. 그 전통이라는 것이 차츰 여기저기로 흩어지고 또 카피 제품의 범람과 함께 옅어지고 마는 것이 상식이지만 소누스 파베르는 이제 이탈리아의 문화를 상징하는 어떤 기념물이 되어 버렸다. 소누스 파베르는 이제 이탈리아의 문화를 상징하는 어떤 기념물이 되어 버렸다. 소누스 파베르는 이제 이탈리아의 오페라를 상징하고, 성악을 상징하는 하나의 에센스로 굳었다. '보고만 있어도 음악이 들려온다'는 표현에 가장 걸맞은 제품이 소누스 파베르인 것이다.

<레드 바이올린>이라는 영화가 있다. 피를 섞어서 색깔을 낸 음울한 바이올린을 소재로 한 영화인데 소누스 파베르의 인클로저를 보면 문득문득 그러한 의문이 든다. 이걸 만든 장인은 과연 처음에 무슨 생각을 했을까. 레드 바이올린과 같은 생각을 한 것은 아닐까. 어느 어둠 속에 놓여 있어도 이 메이커의 스피커들은 광채가 난다. 다른 제품들과 차별화가 두드러지는 것이다. 소누스 파베르가 등장한 뒤를 이어 엇비슷한 디자인의 제품들이 선을 보였으나 모두 시들어 버렸다.

유사 제품이라는 평판 속에서 말이다. 그래서 이제 소누스 파베르는 오히려 독점 체제로 안심하고 들어선 것같다. 아무도 이제품의 모양새나 내용을 모방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버린 것이다. 근래 들어 소누스 파베르는 매년 신제품을 내놓는다. 애초의 그 화려하고 독특한 디자인을 유지하면서 때로는 엄청나게 비싼 제품도 만들고 또 그에 대한 반발인지 염가판도 만들어 낸다. 보통 이 정도면 음악 듣는 데 아무 지장도 없다는, 그런 카피문구의 제품도 나온다. 거기에 소형기도 물론 빠지지 않고 라인을 이어 가고 있다.

시청한 이 소형기도 근래에 시작된 엘립사 시리즈의 막내둥이인데 역시 작지만 외형만 봐도 단숨에 소누스 파베르의 가문임을 알 수 있다. 소누스 파베르의 제품들은 모두 별로 큰 크기가 아니다. 미국 제품이 일반적으로 체격이 큰데 비해 이탈리아 제품은 대부분 작다. 거주 공간이 우리나라와 별로 차이가 없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왜소한 체격의 콤플렉스 때문에 일본인들이 큰 체적의 스피커에 넋이 나간 영향으로 우리나라에서도 비슷한 문화가 고착되어 버렸지만 지금은 그것이 상당히 순화되어 고가의 스피커라고 해도 예전처럼 무지막지하게 크지만은 않다.

문화의 진정세라고 봐야 할 것인가. 소형 스피커와 인티앰프 애호가도 굉장히 많이 늘어났다. 이 깜직한 소누스 파베르의 새로운 소형기는 2웨이 후면에 덕트를 내놨다. 새로운 시리즈라고 해도 전통이 돌변한다거나 사운드가 변모를 보인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이 새로운 시리즈의 특징은 유닛이 달라졌다는 것이 으뜸이지만 소리를 들어 보면 전통적인 소누스 파베르의 소리에서 크게 달라진 것은 없다.

소누스 파베르의 사운드 특징을 뭐라고 정의할 것인가. 그 으뜸은 사용하는 애호가들의 성향으로 평가가 된다. 무엇보다도 사운드의 경향이 소란한 것을 싫어한다. 우아하고 고상한 귀족집안의 규수라고 한다면 맞는 것일까? 상스러운 개그나 천박한 대사를 쓰지 않고 최고의 포도주에 요리사가 내놓는 정찬을 잔디밭에서 즐기며 레이스가 달린 드레스를 입고 천천히 정원을 산책하는 고전적인 모습들. 소누스 파베르의 사운드를 생각하면 자꾸만 그런 쪽으로 연상이된다.

뒷면의 연결 단자를 봐도 싱글뿐이다. 단자 값을 절약하려고 싱글로 했을까? 아닐 것이다. 더블 단자야 말로 스피커 경쟁과 허세가 만들어 놓은 대표적인 과불급의 작태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음질감은 약간 향상되는 것 같지만 그것보다도 더 수십배 잃는 것이 있따. 케이블 2조를 사용해야한다는 강요와 협박, 이놈의 케이블은 점퍼선 하나에서도 엄청나게 달라진다. 그 고뇌를 제작자들은 이해나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더블로 해도 별거 없으니 우리가 해놓은 대로 싱글 연결로 들으세요 라는 양식을 우리는 소누스 파베르에서 만날 수 있는 셈이다.

트위터의 형상이 좀 특이하다. 페이즈 플러그 형식이지만 마치 달팽이 뿔처럼 돌기나 하나 나와 있다. 기술적 뒷받침위에 이런 트위터를 만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소 연약해보임으로 만지작 거리는 것은 금물이다. 소형기의 통상적 디자인과 다른 것은 가로 체적이 크다는 점이다. 그래서 길이를 보면 정사각형에 가깝다. 소형기의 체적 한계를 극복해보려는 의도 때문일 것이다. 이 스피커를 패스의 앰프와 매칭을 시키면서 무엇보다도 염려스러웠던 것은 음장감이었다. 소형기는 사실 좀 딱딱하다. 그걸 정밀하고 정확하다고 표현할 수 있지만 나긋거리지 않고 움츠려 드는 맛이 있으며 성악을 하는 가수들의 입이 점점 작아지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는 것이다.

재즈를 들어도 흥겹지 않고 음정, 박자에만 신경을 쓰고 있다는 그런 느낌, 그것이 지난 시절 소형기에 대한 기본적인 노파심 같은 것이었다. 근래 들어 그러한 노파심을 완전히 허물어 버리는 소형기들이 속속 나타났다. 저역에서는 조금 부족할 수 밖에 없지만 그 외에는 구태여 중형기나 대형기를 쓸 필요가 없겠구나 라는 충격을 주기에 충분한 소형기들이 두 손으로 꼽기에도 부족할 만큼 나타나주고 있는 것이다.

소누스 파베르의 이 소형기는 무엇보다도 가격이 헐하다. 무조건 상당히 고가인줄로만 알았더니 예상 외의 가격이었다. 소누스 파베르는 비싸다는 공식을 허물어줘서 놀랐고, 들려주는 소리 역시 기대를 조금도 저버리지 않아서 다시 한 번 놀랐다. 여전히 고상하고 우아한 양가집 규수 같은 사운드, 그 본류에 더 한발자국 다가서 있는 사운드인 것이다. 팝 음악 역시 아름답다. 가슴에 스며들 만큼 감미롭게 노래를 부른다. 시끄럽게 과시하지 않고 내면적으로 아름다운 음악을 좋아하는 애호가라면 바로 이런 소리를 들어 보길 바란다. - 김남.

- 월간오디오 2008년 6월호글 발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