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은한 색채가 빚어내는 은밀한 유혹

1985년 설립되어 불과 스무 해도 채 되지 않는 사이에 덴마크를 대표하는 하이엔드 오디오 메이커가 된 그리폰 오디오 디자인의 기기들이 연출하는 음향을 피아노에 비유하면 어떤 피아노라고 해야 할까? 강철 같은 당당함, 크리스털 같은 투명함, 백화(白花)가 제방(齊放)한 듯한 화려함 등을 역동적으로 통합하는 스타인웨이일까? 아니면 악음의 부드러운 어우러짐과 강력한 다이내믹 사이의 유연한 조화를 추구하는, 빈의 피아니즘을 대표하는 피아노 뵈젠도르퍼일까? 필자의 생각으로는 뵈젠도르퍼에 가깝다고 하고 싶지만, 그리폰이 구사하는 음향을 떠올려 보면 딱히 그렇다고만 하기도 어려운 구석이 있다.

이들이 추구하는 우아함의 미학에는 단순한 의미에서의 풍만함이나 화려함을 거부하는 정묘(精妙)함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마도 단아함 또는 전아함을 담아내는 은은함의 미덕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화사한 듯하지만 그 속에는 새침데기 처녀의 수줍은 그늘이 숨어 있고, 그래서 얌전한 듯하지만 뻐꾸기 인사처럼(술래가 나를 찾지 못하니 모습은 드러내지 못하고 숨어 있는 자리에서 뻐꾹뻐꾹 소리를 내며) 자신의 존재를 알리려는 천진함이 모습을 드러내며, 그래서 앉아 있는 자태가 아리땁다고 하면 좋을 듯한데 윗입술 위에 애교 점 하나 찍고 그윽한 시선으로 뭇 남정네를 남몰래 유혹하는 요부의 관능미를 언뜻 내비치곤 하는 것이 그리폰의 음향이라고 하면 수사가 너무 요란한 것일까?

그리폰의 모노블록 앰프인 안틸레온 시그니처의 음향은 손쉽게 우아하다고만 하기에는 뭔가 찜찜함이 남는 묘한 향취를 풍기고 있다. 이 앰프가 섬세한 표정의 주밀한 음향을 이끌어 낸다는 클래스 A 증폭 방식으로 175W의 출력을 이끌어 내는 것이므로 그게 그럴 것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CD 트랜스포트에 메트로놈 테크놀로지의 칼리스타, D/A 컨버터에 코드의 DAC 64, 프리앰프에 그리폰의 소나타 알레그로, 그리고 스피커에 윌슨 베네시의 키메라 등과 조합한 시스템에서 안틸레온 시그니처는 감상자를 향하여 달음질해 오기보다는 어느 순간 멈칫하며 음악의 단아한 자태를 구경하라는 듯한 다소 소극적인 태도를 취한다.

눈에 꽉 차게 들어오는 큰 덩치에 비하면 이 앰프의 음향은 이처럼 유순하고 은밀하다고 해야 제격일 것 같다. 음향에 실린 색채야 더 말할 것도 없이 섬세하고 나긋하여 은은한 유혹이라고 해도 좋을 듯한데, 여기에 하이엔드 앰프의 기본 덕목이라고 할 수 있는 정숙성과 절제를 더 얹고 보니, 이 앰프에서는 반드러운 관능미가 살아 있는 선율선들이 여유 있는 흐름 속에 삼삼하게 녹아드는 모습이 보기 좋게 살아난다. 이쯤 되면 이 앰프의 음향은 부드러운 윤곽선으로 연출하는 독특한 분위기의 풍경 사진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든다.
이러한 모습은 1971년 첼리비다케가 SWR 슈투트가르트 라디오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지휘한 브루크너의 '제7번 교향곡' 녹음(DG 00289 477 5136)에서 잘 살아나고 있다. 이 녹음에서 안틸레온은 폭넓은 음향 무대 속을 활주하는 매끄러운 선율선을 관능적인 음색으로 그려가는 모습을 보여 준다. 절제된 저음역으로 인하여 에너지 밸런스가 중·고음역으로 상향하면서 음향 자체가 다소 가벼워지고 텍스처어 또한 다소 얇아지는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지만, 이 정도의 문제라면 튜닝 과정에서 얼마간 보완을 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 앰프가 음악의 골격을 분명하게 제시하는 당당한 음향을 선호하는 필자 같은 애호가를 제 편으로 끌어들이기에는 한계가 분명할 것 같다. 세심한 튜닝 작업이 필요한 부분이다. 그러나 정작 이 앰프에서 눈여겨볼 것은 따로 있다. 그것은 음향 자체를 자극적으로 내몰지 않으면서 순도 높은 음색과 반드러운 선율선을 소담한 음향 무대 속에 우아한 이미지로 통합하는 과정에서 살아나는 정중동(靜中動)의 긴장감이다. 어찌 보면 이것은 이 앰프가 자신의 존재 이유를 증명하는 가장 비밀스러운 부분이라고 할 만하다.
왜냐하면 바로 이 대목에서 안틸레온의 음향은 빈 필하모닉의 풍만함과 화려함에서 벗어나 고순도 선율선들의 소박한 어우러짐을 지향하는 슈타츠카펠레 드레스덴 스타일을 향한 긴 여정을 시작하기 때문이다. 소박함, 정교함, 투명함 등을 찾아나서는 그리폰의 마법 여행이 문을 여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만나는 안틸레온의 음향은 볼프강 자발리쉬가 지휘한 저 유명한 슈만의 교향곡 전집(EMI 5 67768 2)과 헤르베르트 블롬슈테트가 지휘하는 브루크너의 '제7번 교향곡'(데논 COCO-75505) 등의 녹음을 연상케 하는 음향의 맥박, 색채, 다이내믹 등을 보여 준다.

질 좋은 모시를 만지는 듯한 독특한 질감의 선율선, 마치 허공으로 날아가 버리기라도 할 듯한 느낌을 주는 섬세한 색채 표현, 강력한 폭발 뒤의 여운까지 음악에 담아내려는 듯한 절제된 다이내믹 등을 투명한 공간감 속에 소담스럽게 담아내는 슈타츠카펠레 드레스덴 특유의 전아한 스타일이 바로 이 지점에서 안틸레온 시그니처와 만나는 것이다. 이럴 때 '대' 쿠프랭의 '클라브생곡집' 녹음(하이페리언 CDA 67480)에서 안젤라 휴이트가 보여 주는 섬세한 색감과 유려한 흐름 등이 온화한 이미지로 떠오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안틸레온은 이 녹음에서 청명함과 온화함이 독특한 균형을 이루고 있는 음향 무대와 그 속을 가로지르는 우아한 선율선을 아련한 이미지로 연출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 그렇다면 울울한 가슴을 단번에 씻어내고 간담을 서늘케 할 장쾌함과 폭발력을 필요로 하는 대편성 음악은 어찌 해야 할지 궁금해진다. 한마디로 중·저음역의 토대가 약하다면, 대편성 음악이 필요로 하는 강건한 골격과 육중한 무게가 약해지면서 음향의 일체감과 장중함이 떨어지는 문제점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음량을 낮추면 음향은 표정을 잃고 담백해질 것이고, 음량을 높이면 고음역을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 올 수 있다.
따라서 필자가 이 앰프의 사용자라면 음향의 순도를 다소 낮추는 한이 있더라도 저음역에 실려야 할 무게와 확산감과 중·저음역의 토대를 든든하게 연출하는 쪽으로 튜닝을 해 갈 것 같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이 앰프는 헤비메탈의 굉음이나 재즈의 개방적인 울림을 포기하는 대신 음악의 섬세한 굽이와 단아한 색채를 소중하게 여기는 기기이다.

음악을 느끼기보다는 느긋한 마음으로 음악을 바라볼 것을 권하는 기기가 바로 안틸레온이다. 그렇기에 이 기기는 약동하는 젊음보다는 음악에 담긴 은밀한 음영을 그윽한 시선으로 곱씹어 볼 줄 아는 중년의 애호가를 위한 기기로 보아야 할 것 같다.

싱그러움과 재치로 우리를 현세의 쾌락에 취하게 하는 젊은 연주가의 모차르트를 감상하는 것도 그 자체로서 즐거운 경험이지만, 삶의 질곡을 음표 하나하나에 새겨 넣은 듯한 탐미적인 선율로 그려가는 노대가의 모차르트가 가슴을 울리는 것은 그의 연주가 삶을 통하여 음악을 보고 음악을 통하여 인생의 희로애락을 음미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음악의 깊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음악의 행간에서 숨쉬고 있는 미묘한 음영 속에 담겨 있다. 이럴 때 안틸레온은 그 세계를 향하는 오솔길 하나를 빠끔히 열어 두고 있는 셈이다. 바로 이것이 장대함이 부족하고 진폭이 여리지만 단아함의 미학으로 애호가들을 은밀하게 유혹하는 그리폰의 세계이리라.